식목일은 왜 4월 5일일까요? 매년 이맘때쯤 학창시절 학교에서 작은 묘목을 받아 심었던 기억, 혹은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 나무를 심었던 추억이 있으실 거예요. 그런데 이 전통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역사적 지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태조 이성계부터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조는 체계적인 산림 정책을 펼쳤고, 이는 유교적 가치관과 결합해 독특한 나무 심기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이 놀라운 산림 복원 성공 사례는 이 500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지혜가 현대 식목일로 이어지는 과정과 오늘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참여 방법을 정리해봤습니다. 선조들이 그랬듯이 미래를 생각하며 후손을 위한 그늘을 심는 전통을 이어 가보는건 어떠세요?
조선 시대의 나무 심기 풍습과 정책
태조에서 시작된 산림 보호 정책
조선 왕조의 산림 정책(https://brunch.co.kr/@flowjeon/689)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려 말기 전란과 벌목으로 황폐해진 산림을 복구하는 것이 새 왕조의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죠. 태조는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산림 보호에 관한 교서를 내렸습니다.
태조실록 1권(태조 1년/1392년 8월)에는 "산림은 국가의 근본이니, 함부로 벌목하는 자는 엄중히 다스리라"는 내용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자원 보호를 넘어 국가 경영의 철학이 담긴 명령이었어요. 특히 태조는 개인적으로도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양 천도 후에는 도성 주변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도록 하여 풍수지리적으로도 도읍의 기운을 강화하고자 했죠.
이 시기에는 '송정(松政)'이라 불리는 소나무 관리 정책이 특별히 중시되었습니다. 소나무는 궁궐과 관아의 건축재로, 또한 조선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의 재료로 쓰였기 때문에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자원이었던 거죠.
세종대왕의 체계적인 산림 관리 시스템
조선의 산림 정책이 체계화된 것은 세종대왕 시대였습니다. 세종은 농업과 산림을 모두 중시했는데(https://blog.naver.com/race47/220468731370), 특히 그의 명으로 편찬된 '농사직설'에는 나무 심기와 관리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85권(세종 21년/1439년 5월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요. "봄에는 나무를 심고, 여름에는 가꾸며, 가을에는 열매를 거두고, 겨울에는 베는 것이 산림을 다스리는 이치이니, 때에 맞게 하라." 계절에 따른 산림 관리의 원칙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죠.
또한 세종은 전국 각지에 '송계(松契)'라는 소나무 관리 조직을 설치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산림청과 비슷한 역할을 한 조직으로, 나무의 식재부터 보호, 벌채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했죠. 특히 눈여겨볼 점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구조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민 참여형 산림 관리는 오늘날 '주민 참여형 숲 가꾸기' 사업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세종은 국가적 차원에서 백성들에게 나무 심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여러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농업과 산림을 함께 관리하는 통합적 접근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정책이었습니다.
숙종~정조 시대의 산림 복원 노력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친 숙종에서 정조 시대는 조선의 산림 정책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많은 산림이 황폐해졌고, 인구 증가로 경작지와 땔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죠.
숙종 때에는 '상시산송윤음(常時山松綸音)'이라는 소나무 보호령이 반포되었습니다. 이는 계절에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산림을 관리하라는 명령이었어요. 특히 이 시기에는 국가적으로 '봄에 나무 심기' 행사가 장려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식목일의 직접적인 기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산림 정책이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정조는 '대전통편'이라는 법전에 산림 관련 법규를 대폭 보완했고, '산림천택처분지법(山林川澤處分之法)'이라는 산림 관리 지침서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조가 수원 화성을 건설하면서 주변 산에 대규모 식목 사업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화성의 풍수지리적 단점을 보완하고 미관을 개선하기 위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을 심었죠. 이는 현대의 도시 계획과 조경을 접목한 선구적인 시도였다고 볼 수 있어요.
조선시대 나무 심기의 사회적 의미
유교적 가치관과 산림 보호 의식
조선시대 나무 심기는 일반적인 자원 관리를 넘어 유교적 가치관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중시했는데, 이는 부모에 대한 공경뿐 아니라 선조가 물려준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것까지 포함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산에 나무를 심는 것은 후손을 위한 것이며, 이는 곧 조상에 대한 효의 실천"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퇴계 이황의 문집에는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백 년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미래 세대를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유교에서 중시하는 '예(禮)'의 개념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맺기를 포함했습니다. 사대부들은 종종 집 주변에 '송정(松亭)'이라 불리는 소나무 정원을 조성했는데, 이는 자연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사유하는 공간이었죠.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에는 묘목을 심는 날짜를 택일할 정도로 나무 심기를 중요한 의례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할 때처럼 길일을 골라 나무를 심었던 기록들이 남아있어, 당시 산림 보호와 조성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을 공동체와 나무 심기 행사
조선시대 농촌 마을에서는 '두레'나 '계'와 같은 공동체 조직을 통해 나무 심기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정월대보름이나 입춘 무렵에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산에 올라 나무를 심는 풍습이 있었어요.
이런 공동 식목 활동은 단순히 환경 보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을의 결속력을 다지는 사회적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나무를 심은 후에는 함께 음식을 나누고 풍물을 치며 '산제'라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죠. 이는 오늘날 식목일 행사가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의 화합을 다지는 기회가 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관이 주민들과 함께 나무 심기 행사를 주관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그는 "백성과 함께 나무를 심으면 산이 푸르러지고, 백성의 마음도 함께 푸르러진다"고 했는데, 이는 환경 보전과 공동체 정신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꿰뚫는 통찰이었습니다.
실제로 안동의 한 마을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송계(松契)'라는 소나무 보호 계가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마을이 산림 보호 전통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경이롭지 않나요?
사대부와 백성들의 나무 관련 기록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와 글에는 나무에 대한 사랑과 철학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져 많은 시의 소재가 되었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시절 "세한도(歲寒圖)"를 그리며 겨울에도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를 통해 역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정신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직접 나무를 심으며 산림에 대한 생각을 여러 글에 남겼습니다. 그의 문집에는 나무를 가꾸고 보호하는 일을 중요시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지식인들이 나무와 산림에 대해 가졌던 특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민간에서도 나무에 관한 속담과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비 온 뒤에 죽순 자란다", "한 해 묘목, 십 년 그늘"과 같은 속담들은 나무 심기와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민중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또한 마을마다 '당산나무'나 '장승나무'와 같은 신성한 나무를 보호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종교적 의미와 함께 환경 보호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간의 세시풍속 중에는 '식수일(植樹日)'이라 하여 마을 단위로 나무를 심는 날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입춘이나 경칩, 혹은 우수 무렵에 이런 행사가 있었죠. 이는 오늘날의 식목일과 놀랍도록 유사한 모습입니다.
현대 식목일로 이어진 조선의 지혜
일제강점기와 식목일의 시작
현대적 의미의 식목일이 공식적으로 지정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의 일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4월 3일을 '식수일(植樹日)'로 지정했고, 이후 '식목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목일 제정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제가 조선의 산림을 수탈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전통적인 나무 심기 풍습을 제도화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죠.
일제는 식목일에 전국적으로 나무 심기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환경 보호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토목 공사와 군수 물자를 위한 목재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정착된 식목일 행사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나무 심기 전통을 형식적으로나마 계승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제가 제정한 식목일이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식수일' 관행과 시기적으로 유사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제가 조선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고 일부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대한민국 정부의 식목일 계승과 발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946년부터 식목일 행사를 계속 이어갔고, 1949년에는 공식적으로 법정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초기에는 4월 5일이었다가 1960년부터는 한식날인 4월 5일 전후로 변동되었습니다. 이후 1960년 국무원고시 제18호에 의해 4월 5일로 지정되었으나, 다시 1961년부터 음력 한식날로 변동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1970년 대통령령 제5211호에 의해 현재와 같이 4월 5일로 고정되었습니다.
식목일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https://korea.kr/multi/visualNewsView.do?newsId=148900271)
식목일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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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60~70년대는 한국의 산림녹화 정책이 본격화된 시기였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국토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전국적인 조림 사업을 진행했죠. 이 과정에서 식목일은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국가적 캠페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식목일 포스터에는 종종 "조상이 물려준 산림, 우리가 가꾸어 후손에게"와 같은 문구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유교적 산림관과 맥을 같이하는 메시지였습니다. 또한 '마을숲 가꾸기'와 같은 사업은 조선시대 마을 단위 산림 관리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식목일마다 소나무 묘목을 나눠주던 기억이 나는데, 이런 교육적 측면도 세종대왕 시대의 '식목악'과 같은 환경 교육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죠.
흥미로운 것은 산림녹화 성공 이면에 있는 어려움과 한계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1960-70년대 산림정책은 경제성과 속도를 우선시하여 생태적 다양성보다는 성장이 빠른 특정 수종(주로 잣나무, 낙엽송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역 고유의 생태계 균형이 다소 훼손되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산림정책에서도 나타났던 한계점으로, 용재(用材)로서의 가치가 높은 소나무 중심의 정책이 다른 수종의 다양성을 다소 제한했다는 점과 유사합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산림 복원 성공 사례
우리나라의 산림 복원 사업은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 내에 황폐화된 산림을 복원한 한국의 경험은 여러 국제기구에서 연구되고 있으며, 산림 복원이 필요한 다른 국가들에게 모범 사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황폐했던 산림이 이처럼 짧은 기간에 푸르게 변한 것은 놀라운 성과입니다. 이런 성공의 배경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산림 보호의 문화적 DNA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산림 복원 과정에서 나타난 '주민 참여형' 모델입니다. '산림계'와 같은 지역 주민 조직을 통해 산림을 관리하는 방식은 조선시대 '송계'와 같은 전통적 산림 관리 시스템을 계승한 것이었죠. 이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강조하는 '지역사회 기반 산림 관리(Community-Based Forest Management)' 개념과도 일치합니다.
또한 한국의 산림 복원 경험은 개발도상국에 '새마을 산림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몽골, 중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여러 나라에서 한국의 산림 복원 기술과 주민 참여 모델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이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산림 지혜가 이제 세계로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조선의 지혜, 현대의 실천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나무 심기 풍습과 정책이 어떻게 현대의 식목일로 이어졌는지 살펴보았습니다.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조상들은 산림을 보호하고 가꾸는 지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습니다.
조선 왕조의 체계적인 산림 정책,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산림 보호 의식, 마을 공동체의 나무 심기 행사 등은 오늘날 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특히 '현세대가 심고 다음 세대가 그 혜택을 누린다'는 장기적 관점은 기후 위기 시대에 더욱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식목일 참여 방법
올해 식목일에는 어떻게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의 지혜를 현대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지역 식목 행사 참여하기: 산림청(https://www.forest.go.kr)이나 지역 산림환경단체에서 주최하는 식목 행사에 참여해보세요. 전문가의 지도 아래 올바른 방법으로 나무를 심을 수 있습니다.
- 도시 숲 가꾸기 자원봉사: 서울그린트러스트, 생명의숲 같은 단체들은 도시 내 작은 숲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주말 봉사활동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 내 집, 내 동네에서 실천하기: 아파트 베란다나 작은 정원에 화분 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동네 공원 가꾸기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 있는 방법이죠.
- 나무 한 그루 입양하기: 여러 단체에서는 '나무 입양'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직접 나무를 심지 못해도 후원을 통해 산림 보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 전통 마을숲 보전 활동: 전국에는 수백 년 된 '당산숲', '비보림' 같은 전통 마을숲이 있습니다. 문화재청과 산림청에서 이런 역사적 숲을 보전하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지역별로도 다양한 전통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곶자왈'(숲) 보전 활동, 경북 안동의 '송계' 전통 계승 행사, 전남 지역의 '당산나무 축제' 등 지역 특색을 살린 산림 문화 행사들이 있으니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 참여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제 식목일은 그냥 나무를 심는 날이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환경 보전의 철학을 되새기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올해 식목일에는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며, 500년의 지혜를 이어가는 주인공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조선시대 문헌에는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 후손을 위한 그늘을 만드는 일"이라는 의미의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가 오늘 심는 작은 묘목이 미래 세대에게 어떤 선물이 될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식목일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A: 현대적 의미의 식목일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정신적 뿌리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단위로 '식수일'이라 하여 입춘이나 경칩 무렵에 함께 나무를 심는 행사가 있었고, 이는 오늘날 식목일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이어졌고 1949년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부터 4월 5일로 고정되었습니다.
Q: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나무 종류는 무엇인가요?
A: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송정(松政)'이라는 소나무 관리 정책이 있을 정도였죠. 소나무는 궁궐과 관아의 건축재로 사용되었고, 조선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의 재료로도 쓰였기 때문에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자원이었습니다. 또한 유교 문화에서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져 문화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Q: 세종대왕은 산림 정책에 어떤 기여를 했나요?
A: 세종대왕은 조선 산림 정책을 체계화한 왕입니다. 그는 '농사직설'에 나무 심기와 관리에 관한 구체적 지침을 포함시켰고, 전국에 '송계(松契)'라는 소나무 관리 조직을 설치했습니다. 특히 세종실록에는 "봄에는 나무를 심고, 여름에는 가꾸며, 가을에는 열매를 거두고, 겨울에는 베는 것이 산림을 다스리는 이치"라는 계절에 따른 산림 관리 원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은 농업과 산림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선진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Q: 왜 조선시대에는 나무 심기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나요?
A: 조선시대에 나무 심기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실용적 필요성으로 건축자재, 선박 제작, 연료 등 생활 필수 자원이었습니다. 둘째, 국방적 중요성으로 성곽과 군함 건조에 목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셋째, 유교적 가치관과 연결되어 '후손을 위한 그늘을 만드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효(孝)의 개념이 확장되어 선조가 물려준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Q: 한국의 산림 복원 성공 사례는 국제적으로 어떻게 평가받나요?
A: 한국의 산림 복원 사례는 세계적으로 놀라운 성공 사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황폐화된 산림을 짧은 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복원한 경험은 국제기구와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민 참여형 모델과 체계적인 정책 실행이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새마을 산림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몽골, 중국,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에 전수되고 있습니다.
Q: 식목일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나요?
A: 산림청이나 지역 산림환경단체에서 주최하는 공식 식목 행사에 참여할 수 있고, 도시 숲 가꾸기 자원봉사에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파트 베란다나 작은 정원에 화분 식물을 기르거나, 동네 공원 가꾸기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나무 입양' 프로그램을 통해 후원하거나, 지역 특색을 살린 산림 문화 행사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Q: 조선시대의 나무 심기 풍습과 현대 식목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 조선시대 나무 심기는 마을 공동체 중심의 자발적 활동이면서 동시에 왕조의 정책적 지원이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실용적 필요와 유교적 가치관이 결합해 일상 문화로 자리잡았죠. 반면 현대 식목일은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어 있고, 국가 주도의 행사 성격이 강합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직접적인 생활자원 확보가 목적이었다면, 현대에는 환경보전과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Q: 유교 사상은 나무 심기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유교 사상에서 나무 심기는 '효(孝)'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효는 부모에 대한 공경을 넘어 선조가 물려준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것까지 포함했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백 년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는 사상은 미래 세대를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유교의 '예(禮)' 개념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맺기를 중시했으며, 이는 산림 보호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Q: 식목일이 4월 5일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식목일이 4월 5일로 지정된 것은 여러 변화를 거쳐 결정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식날(寒食)과 연결되었는데, 한식은 청명(淸明) 전날로 조상의 묘를 찾아 차례를 지내고 묘역을 정비하는 날이었습니다. 한식과 청명 무렵은 봄이 시작되어 나무 심기에 적합한 시기였죠. 1960년부터 한식날로 변동되다가 산림녹화 정책이 본격화된 1970년에 대통령령으로 4월 5일로 고정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나무의 생장에 가장 적합한 봄철이면서 농번기 이전이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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