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여름 오후, 할머니 댁 뜰에서 잘 익은 무화과를 따려다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검붉은 무화과를 둘로 갈라보니 붉은 과육 사이사이로 벌레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는데, 할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거 벌레 아니야. 무화과의 친구들이지."
꽃이 없는 과일, 무화과의 비밀

무화과라는 이름부터 신기하다. 이름이 무화과인 이유는, 겉으로 봐서는 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화과를 따보면 열매처럼 생겼지만 사실 속의 먹는 부분이 꽃이다. 즉 우리의 눈에 보이는 열매 껍질은 꽃받침이며, 내부의 붉은 것이 꽃이다. 우리가 먹는 달콤한 과육 하나하나가 사실은 작은 꽃들의 집합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놀라운 일이다. 다른 과일들은 화려한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데, 무화과는 꽃을 감추고도 번식에 성공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좀벌이라는 작은 히어로
답은 무화과좀벌이라는 1-2mm의 작은 곤충에 있다. 무화과나무속 만 화분 매개하는 벌들이 있는데 이들은 "Fig wasp"이라고 부르며, 이들의 생태는 매우 특이하다. 이 작은 벌들이 없다면 무화과는 단 하나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할머니가 "친구들"이라고 부른 것들이 바로 이 무화과좀벌들이었다. 평범한 벌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생애는 특별하다.
암컷 좀벌의 일생은 운명적 여정과 같다. 성숙한 암컷은 짝짓기를 마친 후 무화과의 향기를 따라 적절한 무화과를 찾아간다. 무화과는 여성 꽃들이 수분을 받을 준비가 되면 유혹적인 향기를 내뿜어 그 나무에만 맞는 특정한 종류의 암컷 좀벌만을 끌어들인다.
생존을 위한 희생
무화과를 찾은 암컷 좀벌이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험난한 관문이다. 무화과의 수정을 위해서는 열매 속 꽃들에 닿기 위한 유일한 입구인 열매 밑둥의 밀리미터 단위로 작은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이 구멍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좀벌은 큰 희생을 치른다. 벌 여왕은 작업에 거의 완벽한 크기이지만,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무화과의 좁은 입구를 통과할 때 날개와 더듬이를 잃는 경우가 많다.
무화과 안에 들어간 암컷 좀벌은 꽃들 사이를 누비며 알을 낳고 동시에 수분을 도와준다. 그리고 여왕이 알을 낳은 후 죽어서 무화과에 의해 소화되어 영양분을 제공한다. 자신의 생명으로 무화과에게 양분을 주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엇갈린 운명
무화과 안에서 태어난 좀벌들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알이 부화하면, 수컷과 암컷 좀벌들은 매우 다른 역할을 맡는다. 먼저 서로 짝짓기를 하고 (그렇다, 형제자매끼리), 그 다음 암컷들은 꽃가루를 수집한다.
수컷들의 삶은 특별하다. 날개도 없고 평생을 한 개의 무화과 안에서만 보낸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임무는 중요하다. 날개 없는 수컷들은 무화과의 외부로 통하는 길을 파기 시작한다. 이 활동은 자신들의 탈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암컷들이 나갈 수 있는 출구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다. 수컷들은 암컷들을 위한 탈출구를 만든 후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진화가 빚어낸 완벽한 파트너십
이 놀라운 공생관계는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무화과-무화과좀벌 상호작용에서 독립적으로 추정된 밀접하게 연관된 무화과와 화분매개 계통의 연령 간의 관계의 강도는 적어도 지난 6천만 년 동안 이 현재 고전적인 상호주의에서 장기간의 공동 분화에 대한 현재까지의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공한다.
6천만 년! 공룡이 멸종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무화과와 좀벌은 함께 진화해 왔다. 무화과-좀벌 상호주의는 7천만에서 9천만 년 전에 독특한 진화적 사건의 산물로 시작되었다.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공생 이야기 중 하나다.
배신자들의 등장
하지만 이 공생관계에도 문제가 있다. 모든 좀벌이 협력적인 건 아니다. 무화과 입장에서 보자면 무화과좀벌 중에는 수분을 도와주는 착한 좀벌(수분매개무화과좀벌) 외에도 생식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는 나쁜 좀벌들도 있다.
이런 '속임수 좀벌'들은 꽃가루를 옮기지 않으면서도 무화과의 혜택만 누리려 한다. 하지만 무화과도 가만있지 않는다. 실험에서 무화과와 좀벌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 결과, 화분을 매개하지 않는 좀벌의 적응도를 감소시키는 숙주 제재가 모든 파생된, 능동적으로 화분을 매개하는 무화과 종에서 발견되었다. 즉, 무화과는 제대로 일하지 않는 좀벌들을 처벌하는 시스템을 발달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의 무화과 이야기
흥미롭게도 우리나라에도 야생 무화과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남해안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최소 세 종의 야생 무화과(천선과, 모람, 애기모람)와 각각 특이적으로 수분을 매개하는 무화과좀벌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천선과나무에는 천선과좀벌(Blastophaga nipponica)이 특히 천선과나무만 화분매개를 하는 벌로 알려져 있다. 이 종의 암컷은 날개가 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벌의 형태를 띠지만 수컷은 날개가 없어서 자칫 다른 곤충으로 오해하기 쉽다.
도시에서 만나는 작은 기적
요즘은 도시 곳곳에 심어진 무화과나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다음에 무화과나무를 지날 때면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 속에서는 지금도 9천만 년을 이어온 공생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걸.
무화과 하나가 익기까지 얼마나 많은 작은 생명들이 희생하고 노력했는지를. 1-2mm의 작은 좀벌이 날개를 잃어가면서도 생명을 이어가려 했던 그 과정을. 그리고 그 작은 생명들이 만들어낸 달콤함을 우리가 맛보고 있다는 걸.
할머니가 "친구들"이라고 불렀던 그 작은 존재들은 정말로 무화과의,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들 없이는 무화과의 달콤함도, 무화과가 주는 영양도, 무화과나무 그늘에서의 휴식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다음에 무화과를 먹을 때는 잠시 멈춰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자. 9천만 년을 이어온 작은 생명들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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