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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나뭇잎이 떨어지는 방법과 숨겨진 비밀. 탈리, 리그닌, 호르몬.

by root8 2025. 6. 10.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발끝에 느껴지는 바스락거리는 감촉에 고개를 숙였다. 나뭇잎 한 장이 완벽한 형태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잎맥 하나하나가 선명하고, 가장자리는 깔끔하게 정리된 채로... 마치 누군가 정성스럽게 가위로 잘라낸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잎은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떨어질 수 있었을까? 바람에 찢겨 나온 것도 아니고, 병들어서 너덜너덜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마치 정해진 시간에 맞춰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심히 살펴보니, 공원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잎은 아직 가지에 단단히 붙어 있고, 어떤 잎은 살짝 흔들리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바닥에는 수없이 많은 잎들이 모두 비슷하게 깔끔한 모습으로 떨어져 있었다.

탈리란?

그날 밤, 검색을 시작했고 알게 된 놀라운 사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식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현상을 과학자들은 '탈리(脫離)'라고 부른다. 탈리란 낙엽, 낙과, 그리고 꽃잎이나 씨앗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식물 기관이 식물 본체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단순히 떨어지는 게 아니라, 식물이 스스로 기관을 분리시키는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마치 사람이 이별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하듯, 식물도 잎을 떨어뜨리기 전에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친다. 잎자루와 줄기가 만나는 지점에 '탈리층(이층)'이라는 특별한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리그닌을 통한 처리

기초과학연구원 연구진이 2018년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셀(Cell)'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식물은 '리그닌(Lignin)'이라는 특별한 물질을 이용해 이 정교한 이별 과정을 수행한다고 한다.

생명과학부 이유리 교수팀, 활성산소에 의한 꽃의 탈리 조절 메커니즘 규명 - 보도자료 - 뉴스 -

[연구필요성]꽃잎, 과일, 씨앗등의 식물 기관이 식물 본체로부터 분리되는 탈리 (abscission) 현상은 식물 내부의 신호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스트레스에도 반응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

www.snu.ac.kr

리그닌은 식물의 목질부를 구성하는 고분자 화합물로, 식물 세포에 기계적 강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나무를 단단하게 만드는 물질이다. 그런데 이 리그닌이 잎이 떨어지는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진은 식물의 탈리가 일어나는 경계에서 이웃하는 두 세포 중 이탈세포(떨어져 나가는 부분)에서만 리그닌이 형성돼 꽃잎을 식물의 본체로부터 정확한 위치에서 떨어지게 하는 울타리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말 신기했다. 리그닌이 마치 정확한 절단선을 그어주는 것처럼, 떨어져야 할 부분과 남아있어야 할 부분을 명확히 구분해 준다는 것이다. 리그닌이 육각형의 벌집구조를 형성하여 기능을 발휘하는데 최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니, 자연의 설계가 얼마나 정교한지 새삼 놀랍다.

호르몬의 지휘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누가 지휘할까? 바로 식물호르몬들이다. 특히 ABA(아브시스산, Abscisic Acid)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울대 연구진의 2022년 연구에 따르면, 활성산소의 농도가 꽃잎이 떨어지는 시기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며,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알려진 ABA 신호전달 경로가 활성화되어 탈리를 촉진하는 내부 신호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갔다. 환경 변화나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식물에게는 생존을 위한 신호가 된다. 이때 ABA가 분비되면서 "이제 잎을 정리할 시간이야"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여러 호르몬들이 협력해서 완벽한 타이밍을 맞춘다. 옥신은 잎의 생장을 조절하고, 에틸렌은 노화를 촉진하며, ABA는 스트레스 신호를 전달한다.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작용해야 잎이 적절한 시기에 떨어질 수 있다.

완벽한 이별의 의미

리그닌의 울타리 역할 덕분에 식물은 탈리가 일어나야 할 정확한 위치에서 잎을 분리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꽃잎이 떨어진 단면에 큐티클 막이 형성되면서 외부 세균의 침입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해 생존력을 높인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정말 감동적이었다. 식물은 단순히 잎을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떨어진 자리를 완벽하게 봉합해서 상처가 아물도록 한다는 것이다. 마치 외과 수술처럼 정교하고 안전하게 말이다.
거리에서 본 그 완벽한 나뭇잎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됐다. 잎자루 끝부분이 그렇게 깔끔했던 이유는, 식물이 미리 그 지점에 완벽한 절단선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이 주는 지혜

요즘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면서 바닥의 낙엽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이제 그 잎들은 그냥 떨어진 쓰레기가 아니다. 각각이 식물의 정교한 생존 전략의 결과물이고, 완벽한 이별의 증거다.
사실 우리 인간도 식물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식물은 필요할 때 과감히 놓아줄 줄 안다. 생존을 위해 잎을 포기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본체를 다치지 않게 보호한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가 오면 다시 새로운 잎을 틔워낸다.
이러한 탈리 현상을 조절하면 낙과로 잃어버리는 식량 작물의 손실을 줄이거나 잎의 탈리를 조절하여 수확량을 늘리는 등 식량 생산 증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한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면 우리 삶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참고 자료

연구 자료

과학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