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오래된 서점 발견한 일본 괴담 그림책. 먼지 쌓인 책장 사이에서 우연히 꺼낸 그 책의 페이지를 넘기던 중 눈에 들어온 기묘한 그림 한 장이 내 호기심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어둑한 숲속, 한 나무에 사람 얼굴처럼 생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떤 얼굴은 웃고, 어떤 얼굴은 울고, 또 어떤 얼굴은 분노에 일그러져 있었다.
"인면수(人面樹)..."
그림 밑에 적힌 이름을 어설프게 읽어보았다. 한자로는 '사람 얼굴 나무'라는 뜻이었다. 일본어로는 '닌멘주(にんめんじゅ)'라고 발음한다. 그때는 그저 어린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시무시한 그림 한 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가끔 꿈에서도 만나곤 했다.
성인이 된 후 일본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 기억 속의 인면수를 다시 마주하게 됐다. 놀랍게도 그것은 단순한 동화 속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일본의 오래된 전설과 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요괴나무였다.
웃음과 울음이 공존하는 열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노트북을 켜고 인면수에 대해 더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방의 작은 책상 위 조명 아래서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그 기이한 나무의 역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얇은 김이 마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에도 시대 일본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따르면, 인면수는 중국 남쪽에 있다고 전해지는 나무로, 그 열매는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고 한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 열매가 웃으면 행운이 찾아오고, 울면 재앙이 닥친다는 미신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림에서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이 함께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묘한 설렘이란. 실제로 사람 얼굴을 닮은 열매를 맺는 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설 속의 인면수처럼 표정을 짓거나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자연의 기묘한 유희라고 할만한 식물들이 실재했다.
인면수, 현실과 전설 사이
"이거 봐, 이게 바로 인형류(人形類)라고 불리는 식물들이야."
식물학을 전공한 친구 민수가 태블릿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는 도심의 작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해 창밖으로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창문 너머의 세계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태블릿에는 '마르티부스(Mandragora officinarum)', 일명 '맨드레이크'의 뿌리 사진이 펼쳐져 있었다. 그 울퉁불퉁한 뿌리는 마치 작은 사람 형상을 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부터 이 식물에 대한 다양한 미신이 존재했다고 한다. 맨드레이크를 뽑을 때 비명을 지르며,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죽게 된다는 이야기까지.
또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자 '파눌리아 잭슨백이(Panulirus jacksoni Bachi)'라는 생강과 식물의 열매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열매는 마치 원숭이의 얼굴을 닮아 '원숭이 열매'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식물들이 존재해. 인간의 뇌는 패턴을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얼굴 형태를 더 쉽게 알아본다고 해.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라는 현상이지."
민수의 설명을 들으며 어릴 적 그림책 속 인면수가 단순한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식물들의 특이한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전설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인면수 이야기를 더 깊이 파고들수록, 이 전설이 단순한 공포 이야기를 넘어 일본 문화에서 가지는 의미가 보였다. 인면수의 열매가 웃거나 울거나 하는 감정 표현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반영한다. 마치 우리 삶의 다양한 순간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듯했다.
어느 날 밤, 일본 민속학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일본의 한 마을 축제에서 닌멘주를 재현한 장면이 나왔다. 나무에 사람 얼굴 모양의 종이 가면들을 달아놓고, 밤이 되면 그 안에 촛불을 켜는 의식이었다. 그 흔들리는 불빛에 의해 얼굴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정이 변하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그 순간 깨달음이 왔다. 인면수는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경이로움, 그리고 그 사이의 신비로운 연결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현대 일본 대중문화에서도 인면수의 모티프는 자주 등장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코다마(나무 정령)는 인면수와 유사한 개념으로, 숲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또한 인기 게임 시리즈 '요괴워치'에도 나무에 얼굴이 달린 요괴들이 등장하며,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닌멘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만의 인면수 찾기
일본 여행 계획을 세우며 가장 기대했던 것은 교토의 오래된 골동품 시장이었다. 혹시 인면수를 묘사한 우키요에(浮世絵) 판화나 관련 물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비가 내리는 교토의 오후, 좁은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작은 골동품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빗소리가 지붕 처마를 때리는 소리와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구석에 자리한 작은 가게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낡은 나무 상자 속 잊혀진 듯한 부채 한 장이었다. 조심스레 꺼내 펼쳐보니, 그 위에는 섬세한 붓질로 그려진 닌멘주가 있었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화난 얼굴의 열매들이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오래된 부채로군요. 메이지 시대 것으로 보입니다."
가게 주인인 노인의 말에 나는 그 부채의 가격을 물었다. 생각보다 적은 금액에 그것은 내 손에 들어왔다. 비록 어릴 적 그림책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이제 나에게는 인면수를 담은 나만의 물건이 생긴 셈이다.
일상 속 인면수를 발견하다
귀국 후, 그 부채는 내 서재 벽에 걸려 있다. 가끔 일상에 지칠 때마다 그 부채를 바라보며 생각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도 '인면수'가 존재하지 않을까? 천차만별의 표정을 짓는 사람들,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감정들, 그리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패턴들.
요즘은 산책을 나갈 때면 나무와 식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기이하게 생긴 나뭇가지, 특이한 형태의 열매, 패턴이 독특한 나무껍질 등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둔다. 그리고 그 사진들 속에서 얼굴과 형상을 찾아보는 작은 놀이를 즐긴다.
지난 주말, 한강변을 걷다가 발견한 오래된 느티나무의 옹이는 마치 웃고 있는 노인의 얼굴 같았다. 스마트폰으로 그 모습을 담아 SNS에 '#현실속인면수'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올렸더니,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발견한 '얼굴'들을 댓글로 공유해 주었다.
흥미롭게도 닌멘주와 유사한 전설은 세계 여러 문화권에도 존재한다. 유럽의 그린맨(Green Man)은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얼굴로 교회 건축물이나 정원 장식에 자주 등장하며, 자연의 재생과 풍요를 상징한다. 중국에서는 '인면도(人面桃)'라는 복숭아 형태의 요괴가 있는데, 이 역시 사람 얼굴을 한 과일로 묘사된다. 이처럼 인간의 모습과 자연을 결합한 이미지는 보편적인 문화적 상상력의 산물인 듯하다.
전설이 주는 삶의 지혜
인면수 전설을 알게 된 후,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다. 웃는 열매가 행운을, 우는 열매가 불운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관점과 태도에 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면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면을 본다. 마치 인면수의 다양한 표정처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경험과 감정이 달라진다.
그림책 속 닌멘주에서 시작된 호기심 어린 여정은 결국 더 깊은 자기 성찰로 이어졌다. 때로는 기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전설 속에도 우리 삶을 위한 지혜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인면수는 일본 공포 영화나 소설에서도 자주 모티프로 활용된다. 유명한 공포 소설가 우메즈 카즈오의 작품에서는 인면수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전통 극 노가쿠(能楽)에서도 가면을 통해 표현되는 다양한 감정은 인면수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요괴 개념이 현대 문화에서도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면, 상상하게 된다. 저 나뭇잎들 사이로 숨어있는 작은 얼굴들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
자주 묻는 질문
Q. 인면수(人面樹)는 실존하는 식물인가요?
A. 인면수는 일본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나무로, 사람 얼굴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맨드레이크나 원숭이 얼굴 열매처럼 사람이나 동물을 닮은 식물들은 실존합니다.
Q. 인면수의 기원은 무엇인가요?
A. 인면수 전설은 일본과 중국의 민간 설화에서 유래했으며, 에도 시대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 식물 중 특이한 형태를 가진 것들에서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인면수 전설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인면수의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삶의 다양한 측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연결성, 감정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Q.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란 무엇인가요?
A. 파레이돌리아는 무작위 하거나 모호한 이미지에서 친숙한 패턴(특히 얼굴)을 인식하는 심리 현상입니다. 구름에서 동물 모양을 본다거나 식물에서 사람 얼굴을 발견하는 경험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Q. 일본 문화에서 인면수와 비슷한 다른 요괴나 전설이 있나요?
A. 일본 요괴 문화에는 코다마(나무의 영혼), 카라카사(우산 요괴), 바케다누키(변신 너구리) 등 일상 사물이나 자연물에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다양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 세계의 경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닌멘주와 유사합니다.
Q. 현대 문화에서 인면수는 어떻게 표현되나요?
A. 인면수는 현대 일본의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숲의 정령들이나 '요괴워치' 시리즈의 나무 요괴들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호러 게임 '영'이나 공포 영화 '주온'과 같은 작품에서도 인면수에서 영감을 받은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Q. 서양 문화에도 인면수와 유사한 개념이 있나요?
A. 서양에는 '그린맨(Green Man)'이라는 나뭇잎으로 형성된 얼굴 모티프가 있으며, 중세 유럽의 교회 건축물과 정원 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켈트 신화의 숲의 정령이나 북유럽 민간 전설의 나무 정령들도 자연과 인간의 형상이 결합된 유사한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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